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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비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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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하엘 비트만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 무장친위대 소속의 전차 에이스였다. 1914년 독일에서 태어나 제국노동봉사단과 국방군에서 복무했으며, 1937년 친위대에 입대하여 아돌프 히틀러 친위대 근위 연대에 배속되었다. 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폴란드, 프랑스, 동부 전선 등에서 참전하여 3호 돌격포와 티거 I 전차를 지휘했다. 특히 1944년 빌레르-보카주 전투에서의 활약으로 백엽검기사철십자장을 수여받았으나, 같은 해 8월 캉에서 전사했다. 그의 전차 격파 기록과 용맹함은 긍정적으로 평가받기도 하지만, 나치 독일에 복무했다는 점에서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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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비트만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44년의 비트만
이름미하엘 비트만
출생일1914년 4월 22일
사망일1944년 8월 8일
출생지독일 제국 바이에른 왕국 디트푸르트 인근 포겔탈
사망지프랑스 노르망디 생테냥드크라메닐 근처
안장 장소라캉브 독일 전쟁 묘지 (재안장)
소속나치 독일
군 복무1934년–1944년
소속 군독일 국방군 육군 (1934–1936)
무장친위대 (1936–1944)
최종 계급SS 친위대 대위
부대제1SS기갑사단
제101SS중전차대대
주요 전투제2차 세계 대전
동부 전선
바르바로사 작전
쿠르스크 전투
치타델레 작전
서부 전선
프랑스 침공
노르망디 전투
빌레르보카주 전투
토털라이즈 작전
훈장기사 철십자훈장 곡엽검 기사 철십자훈장
군 경력
복무 기간1937년 - 1944년
직책제101SS중전차대대 대대장
전차 격파 수138대
독일어 표기
독일어 이름Michael Wittmann
관련 정보
전차 격파138대

2. 생애

미하엘 비트만은 1914년 4월 22일 독일 바이에른 주 포겔탈에서 태어났다. 제국노동봉사단에서 아우토반 건설 등에 참여했으며, 1934년부터 2년간 제19보병연대에서 복무했다. 1937년 SSVT에 지원하여 부사관 후보생으로 선발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직전 중사로 임관되었다.

1939년 폴란드 침공 당시 SS친위기갑연대(LSSAH연대) 장갑차 소대에 배속되어 참전했다.[3] 1940년 황색 작전에 참가하여 덩케르크 포위전에서 활약했다. 이후 무장친위대로 개편된 LSSAH 여단에서 돌격포 중대 편성을 위해 유터보그 포병학교에 파견되었다.

LSSAH의 돌격포병이 된 비트만은 그리스 전역에 참전했고, 1941년 독소전이 발발하자 독일 1 기갑집단(Panzergruppe 1)에 배속되어 3호 돌격포 차장으로 우만 포위전에서 T-26 경전차 6대를 격파하는 등의 공을 세워 1, 2급 철십자장을 수상했다. 로스토프까지 진출했으나, 소련의 동장군과 보급 문제로 어려움을 겪던 중 부상으로 본국에 송환되었다. 이후 막스 뷘세(Max Wuensche)의 추천으로 사관후보생이 되었다.

1942년 7월, 바트 퇼츠 SS사관학교에서 사관 교육과 전차병 훈련을 받고, 1942년 12월 소위로 임관하여 LSSAH 사단의 제1SS전차연대 제13중대에 배속되어 티거 I 전차장이 되었다. 이때 발타자르 볼 SS상등병이 그의 포수가 되었다.[3]

1943년, LSSAH 사단은 동부 전선에 재파병되어 제3차 하르키우 공방전에서 하르키우 시가지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1943년 7월 쿠르스크 전투에서는 프로호로프카 전차전에서 약 40대의 소련 전차를 격파하는 등의 전과를 올렸고,[3] 쿠르스크 전투에서만 전차 30대, 대전차포 28문을 격파했다.[3] 이후 LSSAH 사단은 이탈리아로 전선을 옮겼다가 다시 동부 전선으로 돌아왔다.

1944년 1월 13일 기사철십자장(騎士鉄十字章, Ritterkreuz des Eisernen Kreuzesde)을 수여받았고, 같은 날 소련군 전차 16대 이상을 격파해 총 80대 이상의 전차를 격파했다. 1월 15일에는 그의 포수 발타자르 볼도 기사철십자장을 받았다. 1월 19일, 비트만에게 백엽기사철십자장 수여가 결정되었고, 2월 2일 아돌프 히틀러가 직접 수여했으며, 친위대 중위로 승진했다.



1944년 4월, LSSAH 사단은 벨기에에서 재편되었고, 비트만의 제13전차중대는 제101SS중전차대대에 합류하여 티거 I을 장비했다. 비트만은 제2중대장에 임명되었고, 발타자르 볼도 전차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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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6월 13일, 빌레르-보카주 전투에서 비트만은 단독으로 영국군 전차 부대를 공격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6] 이 공로로 6월 25일 히틀러로부터 나뭇잎과 검이 달린 기사철십자훈장을 받고 SS대위로 승진했다.[7]

1944년 8월 8일, 비트만은 토털라이즈 작전 중 전사했다.[8] 그의 전차를 격파한 부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캐나다 4 기갑사단의 셔먼 파이어플라이에 의해 격파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1983년 유골이 발견되어 라 캉브 독일 전쟁 묘지에 안장되었다.

노르망디 라 캉브 독일 전쟁 묘지에 있는 미하엘 비트만의 묘

2. 1.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1914년 4월 22일 독일 남부 바이에른주 오버팔츠 포겔탈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졸업 후 아버지의 농사일을 돕다가 1934년 2월 제국노동봉사단에 지원해 아우토반 건설과 프랑스 국경의 서부 방어 요새(지그프리트 방어선) 건설 사업에 참여했다. 1934년 10월 30일부터 1936년까지 제19보병연대에서 2년간 의무 복무를 마쳤다. 1937년 SSVT에 지원하여 부사관 후보생으로 선발되었고, 개전 직전 중사로 임관되었다.

2. 2. 1939년 ~ 1941년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비트만은 SS친위기갑연대(LSSAH연대) 장갑차 소대에 배속되어 참전했다.[3] 9월 28일 폴란드 전역 종료 후, LSSAH 연대는 프랑스와의 전쟁을 대비하여 독일 서부 국경으로 이동했다.

1940년 5월 10일 황색 작전(Fall Gelb)이 발동되어 LSSAH 연대는 네덜란드에 침공했다. 벨기에 침공에 이은 프랑스 점령 작전에 참가한 비트만은 덩케르크 포위전에서 일익을 담당했다. 6월 22일 프랑스와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 그 후 SSVT는 무장친위대로 명칭을 바꾸고, LSSAH 연대는 이후 여단 편제로 변경되었다. 이때 비트만은 돌격포 중대 편성을 위해 선발되어 유터보그 포병학교에 보내졌다.

LSSAH의 돌격포병이 된 비트만은 그리스 전역에 투입되었고(그리스는 산악 지형이라 돌격포의 역할은 미미했음) 이후 독일-소련 국경으로 이동한 뒤, 1941년 6월 22일에 개전한 독소전에 참가했다.

LSSAH 여단은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가 지휘하는 독일 1 기갑집단(Panzergruppe 1)에 배속되어 선봉을 맡았다. 비트만은 3호 돌격포의 차장이 되었다. 7월 16일부터 시작된 우만 포위전에서는 비트만은 16대의 전차(수치에 대해선 여러 설이 있다)와 만나 지형을 교묘히 이용하여 일방적인 공격을 가해 6대의 T-26 경전차를 격파했다. 이 공적은 높게 평가되어 제2급 철십자장을 수상했고, 그 후에도 확실한 전과를 올려 9월에는 제1급 철십자장을 수상했다.

로스토프까지 진출한 LSSAH 여단은 다른 독일군과 마찬가지로 소련의 동장군과 진흙탕에 발목을 잡히게 되고 돈강 유역에 고착되었다. 보급이 어려워진 독일군은 서서히 전력을 소모하게 되었고, 소련군의 인해전술로 출혈이 심해졌다. 돈 강을 둘러싼 연이은 일련의 전투에서 부상을 당한 비트만은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이때 LSSAH 여단장 제프 디트리히의 부관으로 근무한 바 있는 중대장 막스 뷘세(Max Wuensche)에 의해 사관후보생으로 추천받게 되었다.

2. 3. 1942년 ~ 1943년

1942년 7월, 건강을 회복한 비트만은 바트 퇼츠 SS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사관 교육과 전차병 훈련을 받았다. 같은 해 11월, LSSAH 여단은 본국에서 재편된 후 사단으로 승격되었다. 1942년 12월, 비트만은 사관 교육을 수료하고 소위로 임관하여 LSSAH 사단의 제1SS전차연대 제13중대에 배속되어 신형 티거 I을 받았다. 비트만은 전차장이 되었고, 발타자르 볼 SS상등병(애칭: 발티)이 포수(조준수)가 되었다. 비트만의 놀라운 적 전차 격파 수를 이야기할 때 포수 볼의 높은 기량과 티거 전차의 고성능은 빠질 수 없다.[3]

1943년, LSSAH 사단은 다시 동부 전선으로 파병되어 에리히 폰 만슈타인의 제4기갑군 지휘하에 제3차 하르키우 공방전에 투입되었다. LSSAH 사단은 하르키우 시가지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고, 제3차 하르키우 공방전은 독일군의 승리로 끝났다. 이로 인해 쿠르스크를 중심으로 한 소련군의 돌출부가 형성되어 후의 쿠르스크 전투로 이어지게 된다.

1943년 7월 4일, 치타델레 작전이 개시되면서 쿠르스크 전투가 시작되었다. 독일군은 소련군 돌출부를 향해 공격을 개시했지만, 소련군은 고도의 대전차 심층 방어선(파크프론트)을 구축하여 독일군을 맞아 싸웠다. 이 때문에 독일군의 진격 속도는 매우 느려졌고, 결국 정체되었다. LSSAH 사단은 제3SS기갑척탄병사단 토텐코프와 협력하여 프로호로프카 점령을 목표로 했다. 7월 12일, 대규모 소련군 전차 부대가 반격하여 프로호로프카 전차전이 일어났다. 비트만과 제13전차중대는 약 40대의 소련 전차를 격파했다고 전해진다.[3] 전선 전체를 보면 독일군의 진격은 예정보다 늦어졌고, 연합군의 시칠리아 상륙이 겹치면서 7월 13일 작전 중지 명령이 발령되어 쿠르스크 전투는 종결되었다. 쿠르스크 전투에서 비트만의 전과는 전차 30대, 대전차포 28문이었다.[3]

쿠르스크에서 철수한 LSSAH 사단은 이탈리아로 전선을 옮겼다. 1943년 7월 25일 무솔리니가 실각하고 이탈리아는 로마를 목표로 하는 미군과 휴전을 맺고 추축국에서 이탈했다. LSSAH 사단은 이탈리아군의 무장 해제를 실시하고 다시 동부 전선으로 돌아왔다.

쿠르스크 전투 이후, 소련군의 공세는 기세를 더했고, 독일군은 궁지에 몰렸다. LSSAH 사단도 후퇴와 제한적인 반격을 반복하게 되었다. 힘든 전투 속에서 비트만은 계속해서 전과를 올렸고, 1943년 12월 6일에는 격파 전차 수가 60대에 달했다.

2. 4. 1943년 ~ 1944년

1943년 1월, LSSAH사단은 동부전선에 재파견되어 에리히 폰 만슈타인의 4기갑군 지휘 아래 3차 하르코프 공방전에 투입되었다. 파울 하우서 SS기갑군단장의 결단으로 SS기갑군단은 전멸을 면하고 보강된 병력으로 반격, LSSAH 사단은 하르코프 시가지 제압에 성공하여 3차 하르코프 공방전은 독일군 승리로 끝났다. 이 승리로 쿠르스크를 중심으로 소련군 돌출부가 형성되어 쿠르스크 전투를 불러왔다.

1943년 7월 4일 치타델레 작전으로 쿠르스크 전투가 시작되었다. 독일군은 소련군 돌출부를 공격했으나, 소련군은 종심 방어 진지를 구축하여 독일군 진격은 정체되었다.

LSSAH사단은 3 SS기갑사단 토텐코프와 협동하여 프로호르프카 탈취를 목표로 했다. 7월 12일 소련 전차 부대가 반격하자 비트만과 13전차중대는 약 40대의 소련전차를 격파했다. 7월 13일 작전 중지 명령으로 쿠르스크 전투는 종료되었다. 비트만은 전차 30대, 대전차포 28문을 격파했다.

LSSAH사단은 이탈리아로 이동했다. 1943년 7월 25일 무솔리니 실각 후, 이탈리아는 연합군에 항복하고 추축국에서 이탈했다. LSSAH사단은 이탈리아군 무장 해제 후 동부 전선으로 복귀했다.

소련군 공세에 독일군은 수세에 몰렸다. LSSAH사단은 후퇴와 반격을 반복했다. 비트만은 1943년 12월 6일 격파 전차 수 60대에 도달했다. 1944년 1월 13일 비트만은 기사철십자장(騎士鉄十字章, Ritterkreuz des Eisernen Kreuzesde)을 수여받았다. 같은 날 소련군 전차 16대 이상을 격파해 총 80대 이상을 격파했다.

1월 15일 비트만의 포수 발타자르 볼에게 사단장 테오도어 비쉬가 기사철십자장을 수여하였다. 1월 19일, 비트만에게 백엽기사철십자장 수여가 결정되었고, 2월 2일 히틀러가 직접 수여했으며, 친위대 중위로 승진했다.

1944년 4월, LSSAH 사단은 벨기에에서 재편되었다. 비트만의 제13전차중대는 제101SS중전차대대에 합류, 티거 I을 장비했다. 비트만은 제2중대장에 임명되었고(205호차), 발타자르 볼(212호차)도 전차장이 되었다.

2. 5. 빌레르-보카주 전투 (1944년 6월 13일)

1944년 6월 13일,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 캉 시 측면을 우회 돌파하려던 영국 제7기갑사단 ("사막의 쥐" 부대) 선봉 전차 부대가 빌레르-보카주에 도착하여 휴식 중이었다. 이를 알게 된 비트만은 즉시 단독 공격을 결정했다.[6] 자신의 205호 전차는 고장이었기 때문에 231호 전차(212 또는 222호 전차라는 설도 있음, 212, 231호 전차는 당시 작전 가능하지 않았다는 설도 있음)에 탑승하여 볼(Voll)을 포수로 불렀다(비트만이 212호 전차에 탑승한 경우, 전차장인 볼이 포수로 이동했던 것으로 된다. 볼은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다는 설도 있다).

비트만은 단독으로 빌레르-보카주 전투를 시작했다. 마을 남쪽에서 기습 공격을 가하여 공격 개시와 동시에 전차 3대를 격파했다. 그 후, 동쪽의 213고지로 이동하여 생울타리를 은폐물로 삼아 도로상의 차량 행렬을 공격, 전차 6대, 장갑병원수송차(하프트랙) 10대, 장갑차 4대, 대전차포 2문을 격파했다.[7] 213고지에서 제2중대의 전차와 합류한 후 다시 빌레르-보카주로 향했다. 시가지에 진입했을 때 전차 3대와 지휘 전차를 격파했다. 여기서 영국군의 대전차포 공격을 받아 231호 전차가 행동 불능이 되자 비트만과 승무원들은 탈출했다(당시 상황에 대해서는 자료에 따라 여러 설이 있다).[7]

곧이어 후속 제1중대가 빌레르-보카주에 진입하고, 바예를라인의 장갑교도사단에서도 증원이 도착했다. 전투는 저녁까지 계속되었고, 영국 제7기갑사단은 큰 피해를 입고 후퇴했다. SS 중전차대대 101는 우회 돌파를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비트만은 이 전투에서 차량 27대를 격파했다.[7] 6월 25일 총통 관저에서 히틀러는 비트만에게 빌레르-보카주 전투의 공로로 나뭇잎과 검이 달린 기사철십자훈장을 직접 수여했다. 이와 함께 비트만은 SS대위로 승진했다.[7]

2. 6. 전사 (1944년 8월 8일)

1944년 8월 8일, 비트만의 제2중대는 아군의 후퇴를 엄호하기 위해 을 향해 출격했다. 이들이 탑승한 차량은 티거 007호였다. 생토 부근에서 벌어진 교전에서 비트만의 부대는 적 전차 3대를 격파했지만, 후방에서 날아온 공격에 티거 007호는 파괴되었고 비트만과 승무원들은 전사했다.[8]

비트만의 전차를 격파한 부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한다. 주요 설은 다음과 같다.

1945년 프랑스 민간인 세르주 바랭이 촬영한 파괴된 티거 007호.


토털라이즈 작전의 일환으로, 영국-캐나다군은 생타냥드크라므즈닐 근처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진격했다. 쿠르트 마이어는 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반격을 명령했고, 비트만은 7대의 티거 전차를 이끌고 지원에 나섰다. 그러나 이들은 양측에서 연합군 전차의 매복 공격을 받았고, 비트만의 전차는 포탑이 날아가는 피해를 입고 파괴되었다.

나치 선전은 연합군 항공기가 비트만의 전차를 공격했다고 보도했지만, 당시 해당 지역에서 전차를 공격했다는 RAF 기록은 없다. 또한 비트만 소속 부대원들과 영국 및 캐나다 전차병들은 항공기의 개입을 부인했다.

1983년, 비트만과 동료들의 유골이 발견되어 라 캉브 독일 전쟁 묘지에 안장되었다. 1985년, 제1 노스햄프턴셔 예오먼리의 전쟁 중 대원이었던 레스 테일러는 동료 조 에킨스가 비트만의 전차를 파괴했다고 주장했고, 같은 부대원이었던 켄 투트 역시 에킨스를 지목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셰브룩 퓨실리어 연대 A중대가 비트만의 전차를 격파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이들은 150m 이내의 가까운 거리에서 독일군 전차를 공격했고, 사격 각도가 티거 전차의 포탄 진입구와 일치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1944년 8월 8일 12시 40분경, 007호를 포함한 4대의 티거 전차가 158번 국도에서 적의 공격을 받았다. 007호는 셔먼 파이어플라이의 직격탄을 맞고 파괴되었으며, 비트만과 승무원들은 전사했다. 당시 파이어플라이 승무원 증언에 따르면, 비트만은 캐나다 4 기갑사단 소속 차량에 의해 격파되었다.

3. 평가 및 논란

미하엘 비트만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뛰어난 전차 에이스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전술적 능력과 용맹함은 높이 평가되지만, 나치 정권에 복무했다는 점과 전쟁 범죄 연루 가능성은 비판받아야 할 부분이다.[10][11][12]

130대 이상의 전차를 격파했다는 기록은 검증되지 않았지만, 비트만은 전쟁 최고의 전차 에이스로 여겨져 왔다. 일각에서는 쿠르트 크니스펠이 비트만의 기록을 능가했을 가능성도 제기한다.

역사가 짐 스토어는 비트만의 빌레르보카주 전투가 영국군에 큰 피해를 입혔을 뿐 아니라, 작전적, 전략적 영향까지 미쳤다고 주장한다.

A.D. 하비는 비트만을 제1차 세계 대전의 영웅 알빈 요크 상병과 비교하며, 총 138대의 전차와 132대의 장갑차를 격파한 기록은 그를 군사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전차 사령관으로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독일 전차 사령관이자 역사가인 볼프강 슈나이더는 비트만의 전술 능력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는 비트만이 빌레르보카주에서 심각한 실수를 저질렀다고 지적하며, 제대로 준비된 공격을 했다면 더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역사가 죄네케 나이첼은 비트만을 "소위 성공적인" 전차 사령관으로 묘사하며, 비트만을 둘러싼 "영웅 숭배"에 대해 언급한다. 그는 전차 사령관들의 격파 기록은 신뢰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으므로 주의해서 봐야 한다고 말한다.

역사가 스티븐 자로가는 비트만이 1943년 동부 전선에서 티거 I 전차를 운용하며 120대의 전차를 격파했다고 지적한다. 그는 티거 I의 우월한 화력과 장갑 덕분에 비트만이 안전한 거리에서 적 전차를 파괴할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1944년 연합군 기술이 발전하면서 티거 I은 더 이상 무적이 아니었고, 비트만은 결국 영국군의 셔먼 파이어플라이 전차에 의해 파괴되었다.

영국 역사가 존 버클리는 많은 역사가들이 빌레르보카주 전투에 대한 기록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고 지적하며, 이는 나치 선전을 무비판적으로 재포장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국의 관점: 비트만은 뛰어난 군인이었지만, 침략 전쟁을 일으킨 나치 독일에 복무했다는 점에서 한국의 관점에서는 부정적으로 평가될 수밖에 없다.

4. 대중문화

비트만은 노르망디 전투 관련 서적에 자주 등장하며, 파트릭 아그테(Patrick Agte)와 프란츠 쿠로브스키(Franz Kurowski) 등의 저서와 그를 다룬 웹사이트도 여럿 존재한다. 아그테는 친-무장친위대 옹호 역사 수정주의 단체인 HIAG(HIAG)와 관련된 저술가이자 출판인이며, 쿠로브스키는 무장친위대의 유명 인물들을 칭송하는 다작 저술가이다.

4. 1. 일본에서의 인기

일본에서는 빌헬름 보카주 전투에서의 활약과 그 후 비극적인 최후 등으로 인해 전기 소설 등에서 자주 다뤄지며, 독일군 전차 에이스 중에서도 인지도가 높다.

그중에서도 파울 카렐이 저술한 『그들은 왔다』(Sie kamen)에 등장하는, 볼의 "흥, 이미 이겼다고 생각하고 있나"에 대한 비트만의 "그런 모양이군. 그럼 가르쳐 주지"라는 대답[14]이 잘 알려져 있다.

참고로, 이 대화는 원서에서는 각각 »Ja, glauben die denn, sie haben den Krieg gewonnen?« 및 »Offenbar, aber sie sollen sich irren.«이며,[15] 직역하면 "그들은 이미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생각하는가?" "그런 모양이지만, 그것은 잘못이다" 정도의 의미이다. 따라서 일본에서 잘 알려진 "가르쳐 주지"라는 표현은 일본어판 번역자인 마쓰야마 켄지의 의역에 크게 의존하는 부분이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4. 2. 서구권에서의 추앙

전쟁 후 비트만은 기갑 에이스(고위 훈장을 받은 전차 사령관)로서의 업적, 특히 대중문화 속의 무장 친위대 묘사를 통해 추앙받는 인물이 되었다. 역사가 스티븐 하트(Stephen Hart)는 "비트만 전설은 확고히 자리 잡았고, 계속해서 엄청난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킨다"라고 말했다.[1] 군사 역사가 스티븐 자로가(Steven Zaloga)는 비트만을 "모든 나치 팬보이들의 영웅"이라고 언급했다. 그는 전차 대 전차 교전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기갑 결투"(두 명의 상대가 서로 마주하는 것)로서 논하며, "더 용감하거나 더 잘 무장한 쪽이 최종 승자가 된다"라고 설명한다. 자로가는 그러한 인식이 "낭만적인 허튼소리"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대부분의 성공적인 전차 사령관들은 기술적 우위가 아니라 전장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한 "매복 전문가"들이었다. 상대가 발견하기 전에 공격할 수 있었던 전차 승무원이 종종 승리했다.[2]

비트만은 쿠로브스키(Kurowski)가 1992년에 쓴 책 『전차 에이스(Panzer Aces)』에 등장하는데, 이 책은 고위 훈장을 받은 나치 전차 사령관들의 전투 경력에 대한 비역사적이고 미화된 서술이다.[3] 스멜서(Smelser)와 데이비스(Davies)는 쿠로브스키가 서술한 동부 전선의 전쟁을 독일군이 "소련군의 많은 만행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부상자들을 걱정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거의 기사도적인 것"으로 묘사했다고 설명한다.[4] 쿠로브스키의 서술 중 하나에서 비트만은 단 한 번의 교전에서 18대의 전차를 격파하는데, 이에 대해 지휘관인 제프 디트리히(Sepp Dietrich)는 그에게 철십자 훈장을 수여하고 요청이 있는지 묻는다. 비트만은 주저 없이 발견한 부상당한 러시아 병사를 돕는 것을 요청한다. 책에는 이와 유사한 "인도적인" 행위가 많이 나와 독일군의 왜곡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4]

참조

[1] 서적 Allied Tanks in Normandy 1944 Osprey 2021
[2] 학술지 Who killed Germany's dreaded 'Black Baron' tank ace? 2010-09-01
[3] 서적 (Gilbert p. 226)
[4] 서적 (Gilbert p. 255)
[5] 서적 British Armour in the Normandy Campaign
[6] 웹사이트 Villers-Bocage https://www.battleof[...] 2023-11-06
[7] 학술지 Normandy 60 years on: myths and legends 2005-03-01
[8] 웹사이트 Heroes and Villains: Radley-Walters & Wittmann https://legionmagazi[...] 2017-08-08
[9] 웹사이트 Heroes and Villains : Radley-Walters & Wittmann https://legionmagazi[...] 2017-08-08
[10] 서적 Normandy Crucible: The Decisive Battle that Shaped World War II Amberley Publishing 2021
[11] 학술지 Face-lifting the death's head: The calculated pictorial legacy of the Waffen-SS and its modern audience 2010-05-17
[12] 학술지 Soldiers with a Special Flair 2002
[13] 뉴스 宮崎駿さん“妄想”のモデル…伝説のドイツ戦車エース、オットー・カリウス氏が死去 93歳 https://web.archive.[...] 産経ニュース 2015-01-28 # 추정 날짜, 링크 깨짐으로 인해 정확한 날짜 확인 불가
[14] 서적 彼らは来た―ノルマンディー上陸作戦 中央公論社 1998 # 추정 날짜, accessdate 없음
[15] 서적 Sie Kommen! : Der deutsche Bericht über die Invasion und die 80tägige Schlacht um Frankreich https://www.worldcat[...] Ullstein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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